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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

봉오동전투 1920년 역사적인 첫 승리

봉오동전투 1920년 역사적인 첫 승리

봉오동전투는 일본군을 상대로 싸운 독립군의 역사적인 첫 승리입니다. 3.1 운동이 일어나고 1년 후인 1920년 두만강과 인접한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의 대규모 전투가 일어납니다. 일본군은 높은 곳에 매복해있던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게 됩니다. 이 전투가 바로 홍범도 장군의 지휘 하에 진행된 봉오동전투입니다. 오늘은 봉오동전투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

1920년 무장투쟁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1년 뒤인 1920년 6월 7일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 간의 전투가 치러집니다. 당시 독립군은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안무, 최진동 등이 지휘하는 최초의 독립군 연합부대였습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처음으로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만듭니다. 연합부대는 각 부대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강력한 독립 무장 부대를 탄생시킵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일본 월강 추격대에 맞서 독립군 연합 부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봉오동의 지리적 특성을 제대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봉오동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삿갓을 뒤집어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고지만 점령하면 적을 공격하고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해 작전을 철저하게 세웁니다. 작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대를 나누어 동쪽 고지와 북쪽 고지 등에 매복합니다. 그리고 봉오동 어귀를 통과하도록 유도된 일본군이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 일제히 공격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지리적 특성을 활용한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일본군은 약 160명 가까이 전사합니다. 이 전투가 바로 봉오동전투이며 일본 정규군을 최초로 패배시킨 전투가 되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독립군 연합 부대는 병력을 확충하고 재정비하고 다음 전투를 준비합니다. 그러던 도중 열받은 일본군이 홍범도 장군을 잡기 위해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합니다.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던 중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가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백두산 쪽으로 함께 도망을 칩니다. 도망가던 도중에 청산리라는 동네에서 일주일 동안 일본군과 10번의 전투를 펼칩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이기며 큰 승리를 이끌게 됩니다.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청산리전투입니다. 청산리전투는 봉오동전투와 같은 해인 1920년 10월에 치러졌습니다.

봉오동전투와 3명의 장군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안무 장군의 국민회군, 최진동 장군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일본 정규군을 무찌른 전투입니다. 봉오동전투가 다른 전투들에 비해 더욱 의미가 있는 이유는 일본군을 상대로 처음으로 승리를 거뒀기 때문입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3인의 장군들은 현재 어디에 안치되어 계시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홍범도 장군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돌아가신 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치되셨습니다. 그리고 작년 2021년 8월 14일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8월 15일 광복절에 봉환식을 마치고 현재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다음으로 국민회군을 이끈 안무 장군입니다. 안무 장군은 현재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작년 2020년에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맞이하여 3천 톤급 잠수함의 이름을 안무함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묘지 위치를 알 수가 없어 대한민국 해군 측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안무 장군을 기념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최진동 장군입니다. 최진동 장군의 유해는 봉오동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 4월에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현재 홍범도 장군과 함께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건 3명의 장군을 포함하여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운 이름 모르는 독립군분들 덕분입니다. 항상 잊지 말고 감사하게 생각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