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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

장사 상륙작전과 772명의 학도병

장사 상륙작전과 772명의 학도병

장사 상륙작전은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역사를 뒤바꾼 전투로 772명의 학도병이 참여했습니다. 장사 상륙작전의 또 다른 명칭은 장사리 전투입니다.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에 위치한 장사리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772명의 학도병들이 자진 입대하여 참전한 장사 상륙작전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학도병 772명을 태운 문산호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열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철저하게 준비한 북한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 유역까지 밀고 내려옵니다. 국군은 서울을 포함한 대부분의 땅을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며 위기를 맞이합니다. 미국을 포함한 16개국이 유엔군으로 참전하고 유명한 작전이 진행됩니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입니다. 맥아더 장군과 국군 그리고 유엔군은 작전에 성공하고 수도 서울을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압록강 유역까지 북한군을 몰아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한 미국 맥아더 장군은 전쟁이 끝나고 한 통의 편지를 남깁니다.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제1유격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여 수행한 작전은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합니다. 대원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적인 행동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쟁이 끝나고 남긴 편지에 적혀 있는 제1유격대대가 바로 장사리 전투에 참여한 772명의 학도병들입니다. 전쟁 당시 제1유격대대는 대구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극비리에 작전 하나가 이들에게 전달됩니다.

작전명령 제174호를 수행하다

극비리에 내려온 작전은 육군본부 작전 제174호였습니다.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적의 거점인 동해안 영덕지구로 상륙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해 한국군의 작전을 유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이 훗날 장사 상륙작전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육군으로부터 명령을 전달받은 이명흠 대위는 큰 고민에 빠집니다. 이명흠 대위는 당시 제1유격대대를 이끌고 있던 부대장이었습니다. 자신의 부대 대부분이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학도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애국심만으로 군대에 자원입대한 학도병이었습니다. 이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학도병들은 2주 동안 훈련을 받고 극비리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장사리로 떠나게 됩니다.

잊지 말고 기억하자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기 하루 전날인 1950년 9월 14일 772명의 학도병들은 장사리로 출발합니다. 학도병 772명을 태운 문산호는 부산항에서 출발해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는 장사리 해변에 도착합니다. 장사 상륙작전이 펼쳐진 장사리는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772명의 학도병들과 북한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게 됩니다. 학도병들을 태운 문산호는 장사리 해변 근처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태풍이 몰아쳐 계획대로 상륙하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걸려 공격을 받게 됩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문산호는 결국 좌초됩니다. 배가 좌초되면서 장사 상륙작전은 시작도 못하고 실패할 위기에 놓입니다. 하지만 학도병들은 거침없이 바다에 뛰어들고 헤엄을 쳐서 해변에 도착합니다. 인천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고 있을 때 장사리에서 772명의 학도병들은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칩니다. 치열한 전투 끝에 학도병들은 길을 봉쇄하고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합니다.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장사 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입니다. 북한군이 반격하기 위해 다시 장사리로 쳐들어오고 학도병들은 탈출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장사리 해변까지 타고 온 문산호가 좌초되었습니다. 바다도 육지도 모두 길이 막혀버린 암흑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명흠 대위는 끊임없이 구조를 요청합니다. 마침내 구조선이 도착하지만 북한군의 맹렬한 총격에 바다 위에서 철수 작전이 시작됩니다. 북한군이 계속해서 공격을 하는 바람에 구조선도 좌초될 위기에 처해버립니다. 수십 명의 학도병을 구조하지 못한 채 구조선은 철수하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772명의 장사 상륙작전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장사리 전투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이제는 잊지 말고 기억하는 후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