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강화도령 백성을 위한 왕이었다
1849년부터 1864년까지 재위한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은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쯤 철종 강화도령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강화도에서 나무꾼이었다 또는 농사를 짓는 농부였다는 이야기 등 그는 왕이 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어떤 왕이었는지 조선 후기 임금 철종 강화도령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어쩌다 왕이 되었나
어린 시절부터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살고 있던 철종이 갑자기 왕이 된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그의 가계도를 살펴봐야 합니다.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사도세자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아들 5명을 낳게 되는데 이중 장성한 아들은 4명뿐이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산이 왕이 되고 훗날 이산이 숨을 거두고 정조의 아들 순조가 11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됩니다. 정조에게는 아들이 순조 한 명뿐이었고 순조 역시 아들이 효명세자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22살의 나이로 요절합니다. 그리고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 역시 23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합니다. 문제는 헌종이 조선 제24대 왕으로 3대 독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식이 정말 절실했습니다. 특히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이 태어나길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23살의 나이로 요절하게 됩니다. 헌종이 죽자 정조 임금의 후손이 끊기게 됩니다. 이때 왕실의 가장 어른이었던 순조의 부인 순원왕후가 종친 중에서 왕으로 임명할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러던 도중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의 손자 덕안군을 왕의 자리에 앉힙니다. 그리고 이 왕이 조선 25대 임금 철종입니다.
많은 종친 중 왜 덕안군일까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들 중 강원도에서 나무꾼으로 살고 있던 덕안군이 갑자기 조선의 왕이 됩니다. 은언군의 자식들 중 막내인 전계 대원군의 아들 중에서 제일 막내인 덕안군을 왕의 자리에 앉힌 건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세자 증손자들 중에 가장 어리고 강화도 시골에서 지내고 있는 덕안군을 왕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철종 강화도령이 어린 시절부터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살았다고 해서 글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 한양에서 글을 공부하다가 자신의 형이 반역을 저질러 둘째 형과 강화도로 유배생활을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종 강화도령은 강화도에서 나름 즐겁고 행복하게 산 것 같습니다. 강화도에 가면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 있습니다. 양순이라는 여인과 풋풋하고 설레는 사랑을 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3대 독자 헌종이 자식 없이 숨을 거두게 되면서 강화도령에서 뜬금없이 한 나라의 왕이 되고 맙니다. 철종 강화도령이 19살에 왕이 되고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22살부터 직접 나랏일을 돌보며 나름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안동김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보는 철종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철종은 백성들을 진심으로 생각하며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봄에 쌀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는 환정과 관련해서 철종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이자를 붙여서 백성들을 힘들게 하니 환정은 백성에게 가장 뼈에 사무치는 폐단이 되었다. 심지어 나눠주지도 않은 곡식에 대해서도 세금을 거두니 백성들이 무엇으로 생계를 꾸리겠는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백성으로 살면서 힘든 점들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기 위해 노력한 왕이었습니다. 또한, 감사나 수령을 막론하고 부정한 물품을 받은 행위가 적발될 경우 갑절을 더한 형률로 다스리겠다고 공표했습니다. 하지만 지방의 감사나 수령들은 철종 강화도령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무서워 한건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였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 세도정치기에 안동 김씨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대로 뜻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철종 강화도령은 힘은 없었지만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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